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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그리고 신학

오리게네스와 역사관

오리게네스와 역사관

오리게네스(Origenes Adamantius, 185년경 - 254년경)는 고대 기독교 최대의 신학자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 교부 중 하나로 알려진 신학자군의 일원이며 알렉산드리아 학파라 불리는 그룹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입니다. '제원리에 대해'(De Principiis)와 같은 방대한 저작을 남겼으나, 그의 이후에는 사후 이단의 의혹으로 많은 저작이 처분되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기독교의 교리학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그의 아이디어와 접근 방식은 이후의 서구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제원리에 대해'는 그리스 동문학파의 중요한 이론을 담고 있으며, 그린노도에서 일어난 기독교 신앙의 진리에 대한 기본 원리를 탐구합니다.

그러나 오리게네스는 그의 일부 이론과 견해 때문에 사후에 이단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일부 작품은 나중에 다른 교리와 충돌하며 비판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 많은 저작물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게네스는 기독교 신학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오늘날에도 많은 학자들에게 연구의 대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리게네스(Origenes)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고대 기독교의 중요한 신학자로, 그의 생애에 대한 정보는 주로 유세비오스의 '교회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부유한 기독교 가정에서 일곱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 레오니데스에게서 성경을 배웠으며, 그의 가정은 기독교를 신앙하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박해 속에서 순교하면서 오리게네스도 스스로 순교에 가입하려 했으나, 어머니의 말로 인해 집에 머물러 순교를 면했습니다. 이때 어머니는 옷을 숨기고 나갈 수 없게 막아 순교를 피하게 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박해 속에서 일족의 재산이 몰수되었지만, 아츠시가의 원조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암모니오스 사커스라는 학자에게 사사하고 그리스 철학을 배웠습니다. 유세비오스에 따르면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멘스로부터 학문을 받았고, 박해가 끝난 후 알렉산드리아에서 디다스 칼리온이라는 기독교 학교를 개설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데메트리오스와의 갈등으로 인해 오리게네스는 팔레스타인으로 이동하여 카이사리아에서 기독교 학교를 개설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기독교 학문을 통해 복음의 정신을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알렉산드리아와의 관계 문제로 인해 팔레스타인으로 옮겨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249년에는 데키우스제에 의한 박해 속에서 오리게네스가 옥에 던져져 가혹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이후 해방되었지만, 옥에서의 생활과 가혹한 대우로 인해 컨디션을 무너뜨리고 곧 사망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클레멘스와 유사한 세계관과 역사관을 가졌으며, 네오플라톤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와 구약성경의 '창세기'를 융합하여 창조에 대한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그는 "창조란 하나님이 없이 자신의 존재를 나누어 주신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이는 신, 세계, 인간, 인간의 신으로의 회귀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원리에 대해'는 그의 세계관과 신학에 대한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며, 여기에서는 성경을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비유적 성경 해석의 수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리게네스의 많은 저작이 사후 300년이 지나서 553년에 이단으로 선고되면서 많은 부분이 손실되었습니다. 그의 이단 선고는 여러 이유로 인해 이뤄졌습니다. 첫째, 그의 "모든 것이 완전히 구원된다"는 사상이 인간의 자유 의지와 모순되어 보였습니다. 둘째, 그의 영혼이 선재한다는 사상이 "인간은 처음부터 영혼과 육체를 가진다"는 생각과 모순되어 보였습니다. 셋째, 삼위일체 이해에서 아버지 하나님이 자녀 하나님보다 역할적으로 더 높다는 종속설 적 이해가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이단 선고는 오리게네스 본인에게 대한 것보다는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것을 고려한 결과로 여겨지며, 그의 사상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