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수위권의 역사 - 니케아 이전 시대
프란시스 A. 설리번(Francis A. Sullivan)은 "2세기의 적어도 수십 년 동안 로마 교회가 한 명의 주교가 아닌 장로단에 의해 지도되었다는 증거가 있다는 학자들의 합의에 동의했습니다." 교회 계층 구조는 1세기 말과 2세기 초에 발전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발전은 교회 연합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구조 중 하나는 에피스코포이(감독자)로 구성된 삼자 형태의 교회 리더십입니다. 이 구조는 장로(장로), 감독(에피스코포스), 그리고 디아코노이(봉사자)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장로들은 감독을 성직하고 도왔으며, 농촌 지역에서는 장로들이 더 많은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디다케(Didache)라 불리는 서적에는 "그러므로 주께 합당한 감독과 집사를 임명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교회들이 이러한 구조를 채택하도록 촉구했으며, 일치, 순종, 신자들 사이, 그리고 주교와 하느님 사이의 계층적 관계를 강조했습니다. 2세기에는 이러한 구조가 사도 계승에 대한 가르침으로 뒷받침되었고, 주교는 사도들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전 주교의 영적 후계자가 되는 구조가 정착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직 구조는 2세기를 지나며 보편적이 되었으며, 현대에 이르러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등에서 계속 사용되고 있습니다.
계층적 관계의 추가적인 요소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에 의해 언급되었습니다. 그의 저서 '스트로마테이스(Stromatis)'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사도들의 발자취를 따라 복음대로 완전한 의 가운데 살았느니라."
교황 수위권의 역사 - 밀라노 칙령 이후
로마의 주교들은 초기에는 대체로 효과가 없었지만, 나중에 교황의 수위권을 지지하는 선례를 제공하는 편지들을 보냈습니다. 이러한 편지들은 교령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적어도 교황 시리치우스(384-399) 시대부터 레오 1세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편지들은 나중에 교회법에 통합될 일반적인 지침을 제공하며, 로마 주교들이 교황의 권위를 이탈리아 외지역에 시행하려는 시도의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교황 시리치우스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는 어떤 주교도 직책을 맡을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교황 심마쿠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로마 주교는 이탈리아 외의 지역의 주교에게 팔리움(주교가 입는 모직 옷)을 수여할 수 있었습니다.
Optatus는 "베드로의 의자"를 분명히 믿었으며, 이를 교회의 선물이라고 부르며 베드로에게 감독의 의자가 수여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나머지 사도들 사이에 연합이 유지되고 어느 사도도 경쟁자를 세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되었습니다.
로마 주교의 권력은 황제의 권력이 쇠퇴함에 따라 커졌습니다. 테오도시우스 2세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의 칙령으로 로마 주교는 "전체 교회의 총장"으로 선포되었습니다. 6세기에는 동방 콘스탄티노플에서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유사한 칙령을 내리면서 교황직이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로마 주교의 권력과 명성이 상당히 높아지면서 "교황"이라는 칭호가 로마 주교에게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로 간주되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간의 갈등은 "새로운 로마"로서 콘스탄티노플이 명예로운 위치로 승격된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플은 새로운 로마이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 주교는 로마 주교 다음으로 명예의 특권을 갖는다"고 규정하여 콘스탄티노플의 지위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여 382년 로마 공의회에서 교황 다마수스 1세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의 주교들과 함께 공의회에서의 콘스탄티노플 주교의 높은 지위에 항의했습니다.
프란시스 드보르니크에 따르면, 다마수스 교황은 "콘스탄티노플의 승격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주요 교구 간의 우선순위 변경이 "완전히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토마스 샤한은 포티우스(Photius)에 따르면 다마수스 교황이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승인했다고 말했으며, 만약 승인되었다면 단지 니케아 신조의 개정에 불과했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로마 주교의 권력은 황제의 권력이 쇠퇴함에 따라 커져가며, 테오도시우스 2세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의 칙령으로 로마 주교는 "전체 교회의 총장"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이로써 로마 주교의 권력과 명성이 상당히 높아지면서 "교황"이라는 칭호가 로마 주교에게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세는 "사도 베드로가 로마 교회에 전달한 것을 보존해야 하며, 이 권위가 부족하거나 다른 곳에서의 도입이나 변경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교황 보니파키우스 1세와 레오 1세의 대표자들에 의해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반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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