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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그리고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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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역사의 정리와 연도별 요약 한국 기독교 시작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조선에 기독교 신자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1593년에는 그리스도인 다이묘 고니시 행장이 조선에 처음으로 기독교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예수회 사제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가 쓰시마를 거쳐 쿠마가와에 상륙했지만, 그의 주된 활동은 일본군의 종군 사제로서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사람들에게 포교를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631년에는 중국 경유로 조선에 기독교 관련 서적이 수입되었으며, 정조 시대에는 베이징 예수회가 조선의 삼행사와 접촉하여 최초의 포교가 이루어졌습니다. 1777년경부터는 기독교를 연구한 학자들 중에서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이들은 사적으로 기독교를 믿었습니다. 조선사상 최초의 기독교 예배소는 1784..
교부의 개념과 대표적인 교부들 교부의 개념과 대표적인 교부들 교부(Church Fathers)는 고대부터 중세 초기의 2세기부터 8세기까지 특히 정통신앙의 저술을 하고 스스로도 거룩한 생애를 보냈다고 역사 속에서 인정받아온 기독교 사상가들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교부는 주로 정교회에서 성사부에 포함되지만, 성사부는 교부보다 시대적으로 넓은 범위를 포함하며, 고대부터 근현대의 정교회 사상가에도 적용됩니다. "교부"라는 용어와 개념은 주로 정교회와 관련이 있지만 가톨릭 교회 출판물에서도 드물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 용어는 정통신앙의 저술을 남긴 기독교 사상가들을 특별히 다루는데 사용되며, 이들은 교부철학을 대표합니다. 많은 성인과 간청된 사람들이 교부에 기여한 정통 신앙의 확립에 기여한 저술가들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네스트리오스(네스..
이그나티오스와 편지 이그나티오스와 편지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오스(35년경 - 107년?)는 안티오키아의 제2대 주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정교회, 비카르케돈파, 가톨릭교회, 성공회, 루터교회 등에서 성인으로 존경받는 사도교부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신품 치명자'라는 칭호 외에 '헌신자'라는 칭호도 부여받았습니다. 이그나티오스는 정교회에서는 '헌신자'라는 명칭 외에 'Θεοφόρος'라는 그리스어 표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그의 이름은 이그나티우스로 표기될 수도 있습니다. 이그나티오스는 어린 시절에 기독교로 전향하였으며, 98년에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의 통치 시기에 안티오키아 교회의 제2대 주교가 되었습니다. 트라야누스 통치 중에는 박해를 받아 로마로 호송 중에 야수에게 물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로마에서의 순..
유스티노스와 로고스론 유스티노스와 로고스론 유스티노스(Justin Martyr, 100년?-165년)는 2세기의 기독교 신학자로서, 그리스 교부 계통에 속하는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는 "교부" 또는 "호교가(혹은 변증가)"라 불리는 최초의 기독교 신학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유스티노스는 신앙을 합리적으로 옹호하려는 데 주력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유스티노스는 정교회, 비카르케돈파, 가톨릭 교회, 성공회, 루텔 교회 등에서 성인으로 숭배되고 있습니다. 유스티노스(Justin Martyr)는 자신의 저술에 따르면 사마리아(이스라엘의 북부)의 플라위아 네아폴리스(현재의 팔레스타인 자치구 나블루스)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프리스크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스티노스는 아테네에서 로마로 이동..
마르키온과 그의 사상 마르키온과 그의 사상 마르키온(약 100년? - 160년?)은 2세기에 소아시아(현 터키)의 시노페 출신으로 알려진 기독교도입니다. 그는 성경의 '정전'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내세우고, 독자적인 '성경정전'을 만들어 자신의 기준에 따라 교리를 정립했습니다. 그의 사상에는 바울에 대한 강한 기울기와 그노시스주의의 영향이 두드러져 있습니다. 마르키온은 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선언되었지만, 그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일부 팔로워들은 로마에서 마르키온파라 불리는 자체 교회를 형성했습니다. 이 이단은 그 후 수세기에 걸쳐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등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마르키온은 성경의 일부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특히 구약 성경을 거부했습니다. 그가 사용한 성경 정전에는 루카와 바울의 일부 서적만 포함되어 있..
오리게네스와 역사관 오리게네스와 역사관 오리게네스(Origenes Adamantius, 185년경 - 254년경)는 고대 기독교 최대의 신학자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 교부 중 하나로 알려진 신학자군의 일원이며 알렉산드리아 학파라 불리는 그룹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입니다. '제원리에 대해'(De Principiis)와 같은 방대한 저작을 남겼으나, 그의 이후에는 사후 이단의 의혹으로 많은 저작이 처분되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기독교의 교리학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그의 아이디어와 접근 방식은 이후의 서구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제원리에 대해'는 그리스 동문학파의 중요한 이론을 담고 있으며, 그린노도에서 일어난 기독교 신앙의 진리에 대한 기본 원리를 탐구합니다. ..
제1차 바티칸 공의회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870년 제 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 수위권에 대한 교리를 발전시켰습니다. 이 공의회에서는 울트라몬타니즘이 교황의 무류성과 최고 권위를 선언하여 공의회주의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Pastor aeternus 교의헌장에서는 교황의 무류성과 교황의 최고 권위에 대한 교리가 선언되었습니다. 이 교의헌장은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교리를 강조하며, 교황이 교리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최고 권위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공의회는 교황의 결정이 그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과 교회 내의 "무류성"이 교황에게 미치는 영향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바티칸 1세는 베드로의 이중 우선권을 정의하였습니다. 교황의 무오류성과 교회의 통치와 규율에 대한 우선권은 가톨릭 신앙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선언되었습니다. ..
포카스의 법령과 동서 분열 포카스의 법령과 동서 분열 602년에 포카스가 비잔틴 제국의 왕좌에 오르면서 로마 교구의 그레고리우스 1세 주교는 포카스를 "자유의 회복자"로 칭찬하고 경건하고 관대한 군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 1세는 604년에 사망하고, 후계자인 사비니안도 606년에 사망했습니다. 이후 포카스는 공석 기간이 지난 후 607년 2월 19일에 봉페이스 3세를 로마의 새 주교로 임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포카스는 로마 정부의 칙령을 통해 보니파시오 3세를 '모든 교회의 수장'이자 '보편적인 주교'로 선포했습니다. 포카스는 "보편 주교"라는 칭호를 콘스탄티노플 교구에서 로마 교구로 옮겼습니다. 이로써 보니파시오 3세는 "복된 사도 베드로의 좌가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되어야 한다"는 법령을 포카스로부터 구하고 얻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