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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그리고 신학

포카스의 법령과 동서 분열

포카스의 법령과 동서 분열

 

602년에 포카스가 비잔틴 제국의 왕좌에 오르면서 로마 교구의 그레고리우스 1세 주교는 포카스를 "자유의 회복자"로 칭찬하고 경건하고 관대한 군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 1세는 604년에 사망하고, 후계자인 사비니안도 606년에 사망했습니다. 이후 포카스는 공석 기간이 지난 후 607년 2월 19일에 봉페이스 3세를 로마의 새 주교로 임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포카스는 로마 정부의 칙령을 통해 보니파시오 3세를 '모든 교회의 수장'이자 '보편적인 주교'로 선포했습니다.

포카스는 "보편 주교"라는 칭호를 콘스탄티노플 교구에서 로마 교구로 옮겼습니다. 이로써 보니파시오 3세는 "복된 사도 베드로의 좌가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되어야 한다"는 법령을 포카스로부터 구하고 얻었으며, "보편 주교"라는 칭호는 로마 주교에게만 속한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키리아쿠스가 자신을 "보편적 주교"로 자리매기려는 시도가 사실상 종식되었습니다.

1054년에 미카엘 1세 세룰라리우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서의 지위를 강화하려는 시도가 로마 주교와의 갈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갈등은 교황 레오 9세의 경쟁자로 내세우려는 노력으로 여겨졌습니다. 교황은 미카엘 1세를 파문하고, 그 대가로 미카엘 1세도 교황을 파문하였습니다. 이 갈등과 파문으로 인해 동서 교회가 분열되었으며, 이 사건이 동서로마 교회의 분리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동서 분열을 촉진한 여러 요인 중에는 로마 교회가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승인 없이 일방적으로 필리오케를 채택하고, 교황이 자신의 통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기증이라 불리는 위조 문서를 사용한 것이 포함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간의 갈등을 더욱 격화시켰고, 이는 최종적으로 동서로마 교회의 분리로 이어졌습니다.

 

제2차 리옹 공의회와 종교개혁


제 2차 리옹 공의회는 비잔틴 황제 미카엘 8세의 서약에 따라 동서 교회를 재결합시키기 위해 소집되었습니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을 분열시킨 대분열을 종식시키고자 그레고리오 10세는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에게 사절을 보냈습니다. 미카엘 8세는 동부에서 라틴 제국의 잔재를 종식시키고 동부의 라틴 독재자들에게 그들의 야망을 억제하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레고리오 10세는 성 요한 교회에서 양측이 참석한 미사를 거행하며, 공의회는 로마 교회가 "보편 가톨릭 교회에 대한 최고의 완전한 우선권과 권위"를 갖고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이 공의회는 분열에 대한 완전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분열을 치유하고자 했던 황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방 성직자들은 완고함을 유지했습니다. 리옹 공의회 이후에도 동서 교회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이는 최종적으로 분리를 넘어 영구적인 것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로마 교황의 수위권은 1517년에 마틴 루터의 개신교 개혁으로 인해 도전을 받았습니다. 루터는 면죄부와 카톨릭 교회의 여러 실천에 대한 반대 입장을 제기하면서 로마 교황의 권위에 대한 논쟁을 촉발했습니다. 교황 레오 10세가 루터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자, 루터는 '보이지 않는 교회'라고 불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을 제안하고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논쟁과 비판은 개신교 개혁의 시작이 되었고,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를 탈퇴하고 새로운 기독교 종파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루터의 행동은 교회의 권위에 대한 깊은 의문을 불러일으켜, 이후 개혁자들과 다양한 교파가 등장하면서 기독교의 다양성이 더욱 커져갔습니다.

또한, 영국의 가톨릭 교회도 정치적, 결혼적, 그리고 신학적 이유로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법적으로 분리되었습니다. 헨리 8세 국왕과 의회는 왕실의 패권을 옹호하기 위해 로마 주교와 교황의 법적 우선권을 거부하고, 이는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 기간 동안에 최종적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이 결정은 영국에서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교회 간의 분리를 더욱 확고히 하게 했습니다.